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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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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는 암살당했지만, 그의 사상은 죽지 않았다!


  • 20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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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는 암살당했지만, 그의 사상은 죽지 않았다! 

{이 글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혁명적 노동자조직 LO(노동자투쟁)의 신문 기사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80년 전인 1940년 8월 20일, 멕시코에서 망명 중이던 레온 트로츠키를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가 산악 도끼를 이용해 살해했다.


이로써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1917년 러시아 노동자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들로 이루어진 혁명 세대 중 마지막 거물이 사라졌다.


트로츠키는 혁명 경험의 정수였다. 그는 1905년에 이미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러시아의 수도에서 첫 노동자 평의회의 활동을 고취시켰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한 증언에 따르면 그는 “오부홉스키 공장에서 트루봇체니 공장으로, 푸틸로프 공장에서 발틱 공장으로, 기병대 승마장에서 육군 병영으로 뛰어다녔는데 마치 모든 장소에서 동시에 연설하는 것처럼 보였다. 페테르부르크의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모두 그를 알았고 그의 연설을 들었다. 대중에게, 그리고 심지어 지도자들에게 그는 저항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쳤다.” 이 활동에 대해 스탈린은 레닌에게 완전히 동의하면서 1918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실질적인 봉기 조직 작업은 모두 트로츠키 동지가 직접 지도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6년 뒤에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1918년 여름,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의 프랑스와 로이드 조지 총리의 영국이 이끄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열강들은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굶겨 죽이려 했고, 황제를 다시 세우려고 한 백군을 지원했다. 내전은 1921년까지 이어졌다. 노동자 국가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군을 성공적으로 건설했고, 그 군대가 내전에서 승리했다. 그는 성공의 열쇠를 줬다. “우리 군대에서 가장 강력한 접착제는 10월 혁명의 사상이었다.” 한 농민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듯이, “거지도 병자도 없는 세상, 소비에트 세상을 위해 붉은 군대는 자기 목숨을 바칠 준비가 돼 있었다.”


세계 혁명을 위해


레닌과 트로츠키의 생각으로는, 혁명이 살아남으려면 독일 같은 선진국들에까지 혁명이 퍼져야만 했다. 1919년에 볼셰비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3 인터내셔널]을 창설해, 1차 세계대전에서 자기 나라 자본가계급을 지지한 사민주의 지도자나 노동조합 지도자를 거부한 여러 나라의 투사를 묶어내고자 했다. 인터내셔널의 첫 4차례 대회에서 트로츠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어난 혁명의 물결은 러시아 이외 지역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다. 생명력이 다 소진된 [러시아] 국가에서는 당 관료조직만이 계속 기능했고, 투쟁에 지쳐 당을 출세 수단으로 여긴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끊임없이 성장했다. 스탈린이 관료조직의 우두머리였는데, 세계 혁명이라는 목표에 충실했던 활동가들을 술수를 부려 몰아냈다. 1922년에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 위험을 알아차리고 대항하기로 했다. 그러나 1924년에 병과 죽음이 레닌을 앗아갔다. 


1923년 트로츠키가 발표한 <새로운 노선>은 노동자 국가 안에서 관료주의가 커져가는 것을 비판했으며, 당내 민주주의 회복과 공업화의 실행과 계획을 주장했다. 다른 지도자들 46명이 서명한 성명서도 방향이 같았다. 러시아 좌익반대파의 투쟁이 시작됐다. 트로츠키와 그의 동지들은 노동자 운동이 전반적으로 후퇴하는 시기에 러시아와 다른 나라들에서 노동자들이 지치고 의욕이 떨어졌지만, 노동자 국가와 그 미래, 세계 혁명의 미래를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좌익반대파는 특히 스탈린 정권의 경제 정책과 1927년 중국에서 노동자 혁명을 패배로 내몬 코민테른의 방침을 비판했다. 그러자 스탈린이 상당수 좌익반대파 성원들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추방했다.


스탈린주의에 맞선 투쟁


쫓겨난 이후,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혁명을 배반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챈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모으려는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연락하기 시작했고, 소련에서 반대파의 소식지를 창간했다. <연속혁명>, <러시아 혁명사>, <나의 생애>, <배반당한 혁명>이나 다른 여러 저서는 혁명 경험의 최고 정수로 남아 있다.


1933년까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공산당과 인터내셔널을 교정하려고 분투했다. 그러나 1933년에 독일 노동운동이 나치에게 저항 없이 굴복했다. 히틀러의 성장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스탈린의 정치 노선에 대해 코민테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죽었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뜻했다.


트로츠키에게 나치즘의 승리는 세계 전쟁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930년대에 미국, 프랑스, 스페인의 노동자들이 파도처럼 일어섰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퇴조의 시기였던 1938년 9월에 제4인터내셔널이 출범했다.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인 ‘이행기 강령’은 새로운 혁명기를 대비하는 노동자 투사들을 무장시키고자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제국주의와 스탈린 관료제의 연합전선은 혁명적 노동자들의 새로운 물결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 그러나 이행기강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1936년에서 1938년까지 진행된 모스크바 재판으로 스탈린은 10월 혁명 세대를 제거했고 트로츠키와 그의 아들 레온 세도프를 향해 거짓말과 비방을 쏟아냈다. 그들이 소련에서 일어난 모든 잘못에 책임이 있으며 이른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동맹자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자유주의 학자 존 듀이가 이끌던 진상조사 국제위원회는 트로츠키가 이런 비방에 반박할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비방에 담긴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들은 트로츠키와 그 동지들의 머리를 원했다. 트로츠키가 살해당하기 전에, 아들 세도프와 트로츠키의 협력자 여러 명이 암살당했다.


국제주의 깃발을 올린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자본의 독재를 극복할 유일한 길인 혁명을 노동자계급이 전 세계로 확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이런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굳건히 이어갔다. 이제 소련을 이끄는 관료집단이 실제로는 노동자계급에서 등을 돌리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그런 강탈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억눌러야 했다. 스탈린과 소련의 지배집단이 두려워한 것은 그들이 10월 혁명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할지라도, 자본주의와 관료주의에 맞선 투쟁을 지속하고 조직하자는 목소리가 계속 남을 수 있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암살해 혁명적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경험 많은 지도자를 없애버리는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죽은 지 80년이 지났지만, 트로츠키주의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경향은 분명 미약하고, 분열돼 있고, 노동자계급과 긴밀히 결합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 사상은 여전히 노동자계급 혁명(역사의 쓰레기통 속에 있는 스탈린주의 곁으로 자본주의를 보내버릴 유일한 길)에 대한 희망을 대표한다.


트로츠키는 망명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 나는 노동자계급 혁명가, 마르크스주의자, 변증법적 유물론자,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레온 트로츠키, 1935년)


출처: 미국 혁명적 노동자조직 스파크 신문, 2020년 8월 24일

<노동자투쟁> 온라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