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국제
 

혁명의 독수리, 로자 룩셈부르크


  • 2025-03-05
  • 339 회

로자.jpg

 

105년 전, 즉 1차 대전 직후인 1919년 1월 15일, 마르크스의 전기를 썼던 프란츠 메링이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로 평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의 나이였다. 1871년 3월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15세 무렵부터 '프롤레타리아'라는 혁명정당에 가입해 활동할 정도로 일찍이 혁명적 사상에 눈을 떴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곳은 폴란드가 아닌 독일이었다.


1898년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당시 독일 사민당에선 수정주의 경향과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이 나뉘어 있었다. 20여 년간 지속된 장기호황과 자본주의의 성장 속에서 베른슈타인을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 경향은 점진적 개량을 통해 자본주의를 고칠 수 있으리라는 허황된 꿈을 가졌다. 룩셈부르크는 1900년에 <개량이냐 혁명이냐>라는 팜플렛을 써서 이들의 미온적 입장을 단호히 배격한 후 점차 이름을 떨쳤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관찰하고 작성한 소책자 <대중파업론> 역시 그녀의 대표 저작이다. 이전까지 대다수 사회주의자는 대중파업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로자는 1905년 혁명기에 러시아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혁명에서 대중파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대중파업은 임금인상과 같은 당면한 경제적 요구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지만, 급속히 확산돼 광범위한 정치적 도전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렇게 노동자계급이 대중적으로 나설 때만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


1차 대전 직후 독일 사민당 지도부가 자국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며 세계 노동자계급을 배신하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탈당해 독일 공산당을 결성했다. 1919년 1월, 사민당이 주도한 정부는 공산당을 지지하며 노동자들을 탄압하기를 거부했던 베를린 경찰총장을 일방적으로 해임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에 반대한 독일 공산당과 노조는 총파업을 선언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한때는 백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고 혁명 세력이 베를린 시내를 장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봉기는 너무 일렀고, 반동 세력의 힘은 아직 강했다. 사민당 정부의 우익 민병대는 이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으며, 결국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민병대에 처형당했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이렇게 말했다. “독수리는 때때로 닭보다 낮게 날 수는 있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처럼 높이 비상할 수는 없다. … 그녀는 독수리였다.” 비록 때 이른 봉기가 실패하며 안타깝게 죽었지만, 수정주의에 맞서 혁명을 단호하게 주장하며 노동자계급의 힘을 믿었던 룩셈부르크의 사상은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는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영감을 많이 주고 있다.


월간 정치신문 <노동자투쟁>(서울) 50호, 2024년 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