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프랑스 혁명적 노동자그룹 LO(노동자투쟁)가 <계급투쟁> 기관지에 작성한 글을 미국 스파크가 발췌해서 영어로 번역했고, 우리가 한글로 다시 옮긴 것이다.}
파리코뮌(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
1870년 9월, 프러시아[독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이 권력을 잡은 지 20년 만에 붕괴했다. 파리 시민들은 독일 점령의 위협에 대항해 무장했고, 도시를 국민방위대로 조직했다. 1871년 3월 18일, 제정을 대체한 부르주아 공화정이 시민들을 무장해제하려고 했을 때, -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화약고에 불을 당긴 것’이었는데 –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코뮌을 선언했다. 80년 전 프랑스대혁명이 수립한 것을 참고해 ‘파리코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정치 지도자들은 겁을 먹고 수만 명의 병사, 장교와 함께 베르사이유로 도망쳤다.
이 최초의 노동자권력은 두 달 조금 넘게 지속됐다. 이 권력은 처음엔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로, 그 다음엔 코뮌 의회와 유진 바를랭, 레오 프랑켈 등의 활동가들로 대표됐다.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구체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긴급조치가 채택됐다. 특히, 임대료 중지,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여성과 아동의 야간노동 금지, 일반 시민을 위한 공공식당 설치 등.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파리코뮌이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파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비군을 폐지해 노동자민병대로 대체하고, 공직자를 직접 선출 및 소환하고, 그들의 임금을 노동자 임금 수준에 맞추는 등 민주적 노동자계급 정부가 무엇인지를 시사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부자들은 노동자계급의 권력이 프랑스 타 지방 등으로 확대될까 두려워, 그들의 질서를 다시 세워야 했다. 수상인 티에르는 베르사이유 군대로 파리코뮌을 공격했다. 영웅적으로 저항했지만, 코뮌 전사들은 패했다. 피의 일주일 동안 최소 2,000명이 학살됐다. 수만 명이 마구 잡혀 들어가서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했다. 루이즈 미셸 같은 사람은 뉴칼레도니아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작가 에드몽 드 공쿠르의 말에 따르면, 부르주아들은 “이런 대숙청으로 대중의 가장 전투적인 부위를 제거해, 전 세대에 걸쳐 혁명의 싹을 없애버리려 했다.” 그 이후에 노동자계급은 처음엔 1905년에, 그 다음엔 1917년에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와 그들의 국가를 공격해서 승리한다. 이것은 전 유럽에 새로운 파도를 몰고 왔다. 그 선두에는 다른 어떤 당들보다도, 코뮌으로부터 전투적 교훈을 가장 많이 얻은 볼셰비키가 있었다.
노동자들은 경험을 통해 배운다
칼 마르크스는 코뮌이 전개되고 있을 때, <프랑스 내전>을 쓰고 있었다. 그와 엥겔스는 파리코뮌에서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 힘이 강렬하게 표출되는 것을 봤다.
마르크스는 역관계가 불리하고, 프랑스에서 소농의 영향이 두드러져 노동자혁명의 요소가 고립돼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1870년 9월 그는 국제노동자협회(제1 인터내셔널) 명의로 미성숙한 봉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설문’을 썼다. 그러나 코뮌이 선포되자마자, 그는 프랑스 수도 노동자들의 ‘탄력성’, ‘역사적 주도성’, ‘희생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코뮌이 파괴되기 전에도 그는, “비록 낡은 사회의 늑대, 돼지, 비열한 악당들에게 짓밟힐지라도 지금의 파리 봉기는 [1848년] 6월 파리 봉기 이후로 우리 당이 해낸 가장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라고 썼다.
레닌이 강조했다시피,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대중의 역사적 주도성’을 확인했고, 자신들의 투쟁에서 부르주아 사회에 맞서 싸울 힘을 찾는 그들의 능력을 확인했다. 심지어 그 투쟁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도 확인했다. 이 측면에선 어떤 강령보다 투쟁의 일보 전진이 항상 더 낫다. 러시아에서 혁명 정당을 만들어 지배권력과 싸우기 위해 노력하면서 레닌은 계급투쟁의 이 근본적인 측면에 항상 의지했다. 레닌은 한때는 노동자혁명을 위해 활동했던 플레하노프 같은 투사들이 노동자계급의 이 힘, 즉 ‘대중의 직관적인 천재성’을 믿지 않았기에 이후에 혁명을 포기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런 이유로 레닌은 1905년 혁명에서 소비에트 등장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알아챘다. 이 관점은 1917년과 그 이후 노동자국가 건설에서도 계속 드러난다. 그는 노동자들이 실수하면, 그 실수로부터도 배운다고 확신했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이 1908년 글에서 강조했듯이, "코뮌은 유럽의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도록 가르쳤다." 레닌은 ‘주도력, 독립성, 행동의 자유, 판에 박은 형식들로부터 벗어나 자발적 집중과 아래로부터의 열정을 결합시키는 것’에 대해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소비에트가 이 길을 따르도록 투쟁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인간해방에 기여하길 원하는 활동가들은 이와 같은 확신을 지녀야 한다.
노동자 민주주의와 자본가 민주주의
파리코뮌에서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노동자계급이 시기와 조건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국가를 단호하게 부수겠다는 결의를 가졌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강조했듯이,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의 경험을 반영해 <공산당 선언>을 보완하려고 했던 유일한 대목이다. 다가올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기존 국가기구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존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 코뮌 지도자들은 이 점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 기구를 해체하고, 사회 질서를 성공적으로 뒤엎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으로 노동자의 무장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코뮌은 또한 부르주아 선거주의에 기초한 ‘사회 공화국’이란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1848년에는 일부 사회주의와 많은 노동자가 여전히 ‘사회공화국’을 희망하고 있었다. 코뮌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이 부르주아 체제를 지배하는 것에 반대했다. 부르주아 체제에서는, 레닌이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강조했듯이, “의회에서 어느 유산 계급의 대표가 국민을 ‘대표하고 억압할’지에 대해 피억압 계급이 몇 년에 한 번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코뮌 노동자들에겐 권력을 행사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뮌은 중앙은행을 차지해서 관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부르주아지가 몰래 자기 군대를 재조직하고 코뮌 분쇄를 준비하려고 중앙은행의 재정을 사용했다.
특히 이 경험은 폭력적이고 잔혹한 탄압이 닥쳐올 때, 노동자들은 유산계급에 맞서 자기 자신의 권력으로 독재를 행사할 때만 부르주아의 착취와 지배로부터(즉, 부르주아의 권력과 경제 통제로부터) 스스로를 참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부르주아 지배 형태가 공화제든, 입헌군주제든, 노골적 독재든 상관없이 이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 소위 민주적 자유에 무관심하다는 말은 아니다. 정반대다. 민주적 자유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민주적 자유가 투사들에게 자기 사상을 좀 더 공공연하게 방어하게 할 수 있을 때만 그렇다. 그래서 민주적 자유가 없는 짜르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는 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항상 가장 앞장서서 싸웠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오직 부르주아의 재산을 몰수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할 때만 진정한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에 베르사이유로 도망간 부자들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이처럼 온갖 약점이 있었어도, 엥겔스는 1891년 <프랑스 내전> 서문에서 파리코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레닌이 썼듯이 파리코뮌은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의 구별이 없는 노동자대중의 자치조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국가였으며, 낡은 지배계급이나 그 소부르주아 하수인들의 반혁명을 막을 수 있는 무장조직이었다.
인터내셔널은 인류가 될 것이다.
출처: 미국 혁명적 노동자 조직 스파크의 신문, 2021년 5월 26일
<노동자투쟁> 온라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