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국제
 

파리코뮨 : 혁명 권력과 여성 해방


  • 2025-02-23
  • 341 회

{이 글은 프랑스 혁명적 노동자그룹 LO(노동자투쟁)가 기관지에 작성한 글을 미국 스파크가 영어로 번역했고, 우리가 한글로 다시 옮긴 것이다.}


 150년 전 프랑스의 여성들은 어떤 권리도 갖지 못했고, 법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임금은 낮았고, 일부는 성매매를 강요받고, 공장과 가족 안에서 억압받았지만 노동계급 출신 여성들은 코뮨의 노동자 권력에서 그들의 자리를 얻었다. 


 여성들은 투표할 권리뿐만 아니라 출마할 권리도 없었기에 선출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국가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그들은 1870년 9월 4일과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의 시위에 매우 많이 참석했고, 반란군의 대포를 빼앗으라는 띠에르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총구를 내려놓도록 설득했다.


 코뮨이 시작되자 여성들은 정치 클럽을 부활시키고 교회를 몰수해 모임을 가졌다. 파리 11구의 ‘앙브루아즈 클럽’엔 3000명의 여성이 참여했다. 17구의 ‘부울 누아’는 재봉사인 소피 푸아리에가 의장이자 설립자였다. 오귀스트 블랑키를 따랐고 이후 무정부주의자가 된 교사 루이즈 미셸은 종종 생베르나르 드 라 샤펠의 ‘혁명클럽’ 의장을 맡았다. 모자를 만드는 블랑슈 르페브르는 거의 매일 저녁 빨간 스카프를 하고, 허리에 총을 차고 ‘사회혁명클럽’에서 토론했다. 기사, 선전물, 선언문들은 ‘라 소시알레’ 신문을 창간한 앙드레 레오 같은 여성들이 썼다.


 코뮨의 여성들은 구조대와 식당 직원, 심지어는 전투원으로도 일했다. 여성들은 각 구역의 구청에서 하루 24시간 근무했는데, 그곳은 방어와 물자공급, 교육을 위해 모집된 자원봉사자들의 장소였다. 여성들은 파리의 입구를 무장한 채로 지켰다. 12구에서 여성 대대는 노동자인 아델레이드 발랑탱 대령과 루이즈 네크베커 대위의 지휘 아래 창설됐다. 


 그들은 남성들과 함께 치안위원회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몽마르트에서는 치안위원회가 두 개였는데, 하나는 남성, 하나는 여성 치안위원회였다. 루이즈 미셸은 둘 다 참여했다. “우리는 임무를 맡는 데 성별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멍청한 질문은 끝났다.”라고 그녀는 회고록에 썼다. 그녀의 신문 ‘사회 혁명’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여성들은 여성의 대의와 인류의 대의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위대한 혁명군의 전투 부대가 되어야 한다.” 


 교육에서 여성들은 무료 초등교육 과정과 직업 학교를 세웠다. 그들은 가정주부를 위한 공공 독서 모임을 조직하고, 낮에 일하느라 학교를 가지 못했던 젊은 사람들을 위해 학급을 개설했다. 마거릿 티네어는 파리에서 장학사 직을 맡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뽈 밍크는 구 교회 건물에서 소녀들을 위한 무상 학교를 개교했다. 


 4월에 카를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의 여성 활동가인 러시아 태생의 엘리자베스 드미트리프에게 자신의 파리 특파원이 되어주길 요청했다. 4월 11일과 12일에 그녀와 일행들은 파리 시민들에게 새롭게 결성한 혁명적 여성 노동자 조직인 ‘파리 방어와 부상자 치료를 위한 여성 연합’에 가입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 단체의 제1목표는 파리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소문은 확언했다. “게다가 과거의 사회적 질서에서 여성의 노동이 가장 많이 착취당했음을 고려한다면, 노동의 즉각적인 재조직은 가장 절박한 것이다 ... 우리는 일하기를 원하고 우리 생산물을 소유하길 원한다... 더 이상 착취자는 없고, 더 이상 주인은 없다! ... 일하면서 자유롭게 살든가, 싸우다 죽든가!”


 주로 여성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여성 연합’은 레오 프랑켈에 의지했는데, 그녀는 노동상업위원회의 회장이었다. 그들은 실업을, 특히 여성의 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공장주가 버리고 간 작업장을 가동할 것, 그리고 노동자들이 인수한 작업장에 군사 장비를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 코뮨의 지도자들은 이 의견에 적극 찬성했고, 즉시 시행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또한 그들 스스로의 요구를 제시했다. 코뮨은 이혼의 권리와 위자료 받을 권리를 부여했다. 코뮨은 “인간 존재의 상업적 착취”인 성매매를 금지했다. 코뮨은 “교육에서 여성의 일은 남성의 일과 똑같다”고 하며, 교사에 대해서도 동일임금을 의무화했다. 국민 방위대의 결혼하지 않은 연인들은 남편 급료에 대한 보조금을 받는 아내들과 같은 권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에게 같은 대우를 요구했다. 코뮨은 당시 노동자 계급에게 흔했던 시민 결합을 사실상 인정했고, 모든 혼외 자녀들을 인정했다. 


 베르사이유 정부가 공격해왔던 5월에, 여성들은 그들에게 해방을 의미했던 새로운 정부[파리코뮨]를 방어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 쌓는 것을 도왔다. ‘여성 연합’은 선언문을 작성했다. : “아니다, 파리 여성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면전이다... 파리의 여성들은 방어를 위해, 그리고 코뮨의 승리를 위해 피를 바치는 방법 또한 알 것이다.” 그리고 군대에 참여한 대부분의 여성은 노동자 계급이었다. 


 피의 한 주 동안, 띠에르가 이끈 공화국 정부의 진압군은 코뮨 전사들에게 즉결 처형, 유죄판결, 강제추방 등의 방법으로 그들이 감히 코뮨을 통해서 얻으려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코뮨 전사들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베르사이유 선전은 심지어 폭탄을 던지는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코뮨 전사들은 피의 한 주의 바리케이드에서든, 감옥에서든, 망명을 하면서든 코뮨에서 했던 역할을 언제나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므로 루이즈 미셸은 자신의 재판에서 베르사이유의 판사에게 자신이 혁명 권력의 일원이었던 것에 대해 이렇게 자신 있게 선언했다. “자유를 위해 뛰는 모든 심장은 조금 앞서 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니 나는 내 권리를 주장한다! 만약 날 살려둔다면, 나는 멈추지 않고 복수를 외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겁쟁이가 아니라면, 나를 죽여라.”


출처: 미국 혁명적노동자조직 스파크의 신문, 2021년 6월 7일

<노동자투쟁> 온라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