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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 칼 마르크스
국제
 

1949년 중국: 농민과 민족주의 혁명


  • 2025-03-06
  • 302 회


{이 기사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트로츠키주의 그룹 LO(노동자투쟁)의 주간 신문 2932호(10월 10일자)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19세기 말, 봉건제 중국을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분할 통치했다. 부패하고 무능했던 중국의 마지막 황실 왕조는 결국 몰락했다. 당시 쑨원이 이끌었던 민족주의 정당은 제국주의로부터 독립된 현대 자본주의 중국을 표방하며 1911년에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은 군벌들의 손아귀에 넘어가 붕괴했으며 분열되고 말았다. 


1925년 이후부터 새로운 혁명이 성숙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러시아에서 시작된 혁명을 확장하고자 노력했던 제3인터내셔널이라는 추동력 덕분에 1921년에 창당됐다. 공산당은 봉건 영주[지주]와 제국주의의 지배를 끝장내겠다는 목표로 수천 명의 노동자를 조직했다. 


스탈린주의의 지도를 받던 제3인터내셔널은 공산당에게 당시 장제스가 이끌었던 국민당과 합당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1927년에 상하이에서 권력을 장악했지만, 장제스에게 그 권력을 넘겨줬다. 장제스는 돌변해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수천 명을 총살하며 노동자 혁명을 피로 물들였다.


이것은 더욱 비극적인 일이었는데, 중국 혁명이 승리했더라면 세계 노동자 혁명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러시아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맞설 기회를 줬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농민 혁명, 소부르주아 지도부


1927년의 패배 이후,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단절된 채 농촌에 고립됐다. 마오쩌둥이 지도하는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기구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인민전선, 즉 부르주아 정당과의 동맹 정책을 채택했다. 1930년대의 과정을 거치며 중국공산당은 급진적 민족주의 정당이 됐다.


1937년, 몇몇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에 대한 투쟁을 멈추고 중국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에 맞서 협력했다. 일본의 점령은 특히 폭력적이었는데,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의 목표는 장개석과 연합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오랫동안 미 제국주의의 지지를 받아왔던 입장이었다. 연합을 깬 것은 장제스였다.


국민당은 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해 인구의 다수로부터 경멸받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부패와 기생성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영향력은 증가했다. 1945년 말 국민당은 반란 농민들과 도시의 소부르주아 거주자들로부터 지지받았던 마오쩌둥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 [농민] 반란을 지원하기까지 오랜 시간 망설였다. 소위 ‘애국적 지주’들을 멀리하지 않기 위해 공산당은 토지임대료 감면이라는 온건한 농업 강령만 가졌었다. 장제스와의 타협이 실현되지 않았고 부르주아 계급 일부가 공산당에 호의적인 것처럼 보였기에, 오랜 주저 끝에 마오쩌둥은 결정을 내렸다. 1946년 여름 명령이 내려졌다: “토지를 공유하라”. 이에 따라 공산당은 반란에 나선 농민들의 권력 장악을 지도하기로 선택했다. 장제스의 군대는 패배했다. 마오쩌둥의 군대는 종종 총 한 발 쏘지 않고 도시로 진입했다.


주변부로 밀려난 노동자계급


면밀하게 저지당한 노동자계급은 마오쩌둥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 선포했다. 장제스는 미국의 보호 아래 대만 섬으로 도망쳤다. 1949년 중국 혁명은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고 봉건적 토지를 공유해 중국 사회를 현대화하고 경제 발전을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 국가를 탄생시켰다. 진보적 소부르주아 계급의 지지를 받은 새로운 정권은 구사회의 많은 반동적 측면을 일소했는데, 특히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 그랬다. 새 부르주아 국가는 곧 대만과 홍콩으로 도망간 중국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 및 제국주의에 맞서게 됐다. 1949년부터 1971년까지, 장제스를 여전히 지원한 미제국주의는 중국에 대한 금수 조치를 취했다. 이런 반대에 직면해 중국은 방대한 농민층을 초과착취해 산업을 국유화하고 발전시켰다.


거대한 중-미 우호


1960년대 말 베트남에서 수렁에 빠진 미국은 이 지역에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그들의 정책을 바꿨다. 이것은 외교적 관계의 재구축으로 이어졌는데,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미국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에 열린 1972년 회담이었다. 경제적으로 중국은 정복해야 할 새로운 시장이자 값싼 노동력의 무한한 공급원이 됐다.


중국 국가의 통제 아래, 서양 자본가들은 팔 벌려 환영받았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자 서양과 일본 트러스트들의 하청업자로서 세계 경제에 통합됐다. 중국 국가는 공장에서 작업질서를 유지하고, 노동자 착취의 열매를 거둬들일 수 있게 하겠다고 발전하는 부르주아지에게 약속하며 스스로를 트러스트들의 대리인으로 만들었다.


이제 수백 명의 억만장자와 수백만 명의 백만장자로 구성된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과 긴밀하게 연결된 중국 국가 덕분에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키울 수 있었다. 노동자계급 역시 상당히 강하게 성장했다. 수백만 명이 도심의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났다. 당시 2억 9천5백만 명이었던 “민공”은 2022년 현재 거의 8억 명에 이르는 막강한 세력으로서, 격렬하게 착취당하면서도 격렬하게 투쟁하기 때문에 중국과 서구 자본가 계급이 경계하는 만만찮은 세력이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에게 달려 있다


오늘날 제국주의는 여전히 통제할 수 없고 특정 분야에서 경쟁력을 발전시켜 온 중국이라는 국가를 고려해야 한다. 이런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2011년 이후 서방 주요 강대국의 정책이었다. 보호주의 장벽을 강화하고, 아시아에 군사력을 배치하며, 전쟁 위험을 고조시키는 것 등이 그 특징이다... 


민족적, 부르주아적 틀 내에서 발생한 1949년 혁명은 새로운 교착 상태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제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유럽과 미국 노동자계급에 수천 개의 끈으로 연결된 중국 노동자계급은 미래에 결정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출처: 미국 혁명적 노동자 조직 스파크의 신문, 2024년 12월 2일

노동자투쟁(서울) 온라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