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미국 노동자들은 1929년 주식 시장 붕괴[대공황] 이후 지속적인 임금 삭감과 끔찍한 생활 수준을 견디다 못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업이 잇따랐는데, 그중에는 농장 노동자와 같이 노동자 계급 중에서 가장 심하게 착취당하는 이들의 파업도 있었다. 이 노동자들은 캘리포니아 당국과 대농장주한테 오늘날 이민자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계급 혐오를 겪었다.
1933년 캘리포이나주 샌 호아킨 밸리[캘리포니아 북부, 샌프란시스코와 인접해 있는 농업 지대]에서 일어난 목화 파업을 통해 알 수 있듯, 노동자들의 투쟁은 인상적이었다. 이 파업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농업노동자 파업이다. 약 18,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의 4분의 3은 멕시코 출신이었고, 그 외에는 남부 주 출신의 흑인, 필리핀계, 다른 주에서 이주해온 백인 노동자 등이 있었다. 그들은 수확한 목화의 양에 비례해 임금을 받았다. 그런데 대공황 3년 동안 그 비율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파업의 시작
1933년 10월 1일 툴레어 시에서 열린 회의에서 노동자들은 임금률을 높이기 위해 파업하겠다고 결의했다. 노동조합에서는 10월 4일에 파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노동자 다수가 지체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직후, 목화 농장 노동자 수백 명이 수확기를 맞은 농장을 두고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33년 10월 4일이 되자 거의 모든 수확 작업이 중단됐다.
‘재배자’(이 지역의 자본주의적 대농장주를 일컫는 말)들은 파업에 맞서 보호 협회를 조직한 다음 이렇게 선언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지금 당장 돌아가서 조용히 일하거나 아니면 캘리포니아주를 떠나라" 그렇게 대농장주를 섬기는 소규모 민병대로 이루어진 보호협회들은 재배자들의 캠프에서 파업참가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노조는 공산당 투사들이 이끌었다. 이들의 수는 적었다. 하지만 이들은 용감했고 노동자 계급에 헌신적이었다. 초창기 투쟁에서 공산당 투사들이 얻은 지도력과 경험 덕분에 목화 파업이 크게 확산됐다.
파업의 확산
노조의 초창기 행동 중 하나는 45 에이커[약 4,047 제곱미터]의 작은 농장을 임대해 그곳에 파업 본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캠프에는 5천 명의 남성과 여성, 아이들이 살았다.
툴레어 시에서 시작된 파업은 곧이어 샌 호아킨 밸리 전역으로 확산됐다. 노조는 샌 호아킨 밸리를 따라 100마일(160km) 넘게 뻗어 있는 수많은 목화 농장에 파업 노동자 조직을 파견했다. 작업 자체는 단순했지만,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 트럭을 탄 파업참가자들이 목화밭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발견하면 멈춰서서 파업 참여를 독려했다.
파업 2주차에 들어서자 농장주들은 민병대와 경찰까지 끌어들여 파업 노동자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파업은 더욱 강해져 목화밭의 목화가 대부분 수확되지 않았다.
10월 10일에는 픽슬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40명의 사측 민병대원들이 비무장 상태였던 파업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총격을 가해 2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직후에 또다른 마을에서는 파업 노동자 측과 재배자 측 사이에 무력 대치가 5시간 동안 이어졌다. 총격 사건 이후 지역 당국은 자신들이 폭동 선동죄와 살인죄로 기소한 파업노동자 9인을 체포했다. 파업을 파괴하려고 하는 이런 시도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두 노동자의 장례식을 치르려고 교회 앞으로 모였다. 이 장례식은 5000명 넘게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캘리포니아 농업 노동자 역사상 이런 대규모 시위는 처음이었다.
파업노동자들이 성과를 얻다
10월 27일, 파업 위원회는 100 파운드(약 45kg) 수확당 75센트라는 임금률을 수용했다. 이는 원래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것에는 약간 미치지 못하지만, 파업 시작 때 재배자들이 제안한 비율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것이었다.
결국, 재배자 측과 주정부는 파업 노동자와 협상할 때 노조의 개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기에 본인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정신 승리일 뿐이다. 농장 노동자의 파업은 그들을 물러서게 하고 임금을 인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는 가장 멸시받던 노동자 중 18,000명이 그토록 강력한 대농장주와 그토록 억압적인 주정부에 맞서서 얻어낸 진정한 승리인 것이다.
캘리포니아 목화 대파업은 노동자 계급 중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가장 착취당하는 이들조차 강대한 부르주아와 정부를 무릎 꿇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공산당 투사들이 투쟁을 이끌다
이 파업 기간에, 산 호아킨 밸리의 들판을 돌아다니는 공산당 투사들은 소수였을 뿐이다. 이 투사들은 파업을 조직하는 데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투쟁의 목표를 세우며 농업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기에 상당한 신뢰를 받을 만했다. 또한 그렇게 했기에 공산당 투사들은 노동자 수천 명으로부터 진정으로 신뢰받았다.
위기의 시기에, 그 영향력은 매우 소중했다. 왜냐하면 캘리포니아 목화 대파업은 당시 미국에서 투쟁이 크게 증가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1934년부터 미국 전역에 걸쳐 자동차 산업, 운송, 샌프란시스코 항구 등에서 주요 파업이 분출했다. 고무나 섬유 같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은 공산당이 혁명사상을 포기했다는 것에 있었다. 진짜 노동자당, 진정한 혁명 정당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놓쳐버렸다.
공산당은 농장 노동자의 투쟁을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2차 대전이라는 시급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민중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자본주의의 총체적인 실패는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해 오늘날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야만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것은 전 세계의 민중을 억압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나타날 ‘잃어버린 기회’였다.
문제는 여전히 똑같다. 노동자들이 고개를 들어 올릴 때, 그 투쟁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마지막까지 이끌 명실상부한 혁명적 노동자 당이 존재할 것인가?
출처: 미국 혁명적 노동자 조직 스파크의 신문, 2024년 8월 5일
노동자투쟁(서울) 온라인 기사